경주 김씨 충암공 후손인 내 친구 응일이
2015년 6월 14일 (일) 몇몇 서울약대 67 동기들과 함께 경주 김씨 충암공(沖菴公)파의 종가(宗家)를 방문하였다. 그 간 두어 차례 이 곳을 방문하여 17대 종손(宗孫)인 대학 동기 응일(應一)로부터 종가의 내력에 관해 들은 바 있지만, 들을 때마다 감동과 함께 큰 교훈을 얻게 되었다. 물론 충암공 종가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인터넷이나 유튜브 등에 많이 올라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주로 종가의 음식에 관한 이야기에 치중되어 있는 등의 아쉬움이 있어서, 이번에 수차에 걸친 응일의 감수를 거쳐 ‘경주 김씨 충암공 종가 이야기’를 정리하였다. 미비(未備)하지만 일독(一讀)을 권고 드린다.
17대 종손인 응일(應一)이 든든히 지키고 있는 충암공 종가는 대전시 동구 신하동 (新下洞) 273-2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충암공 등 1~5대의 조상의 묘는 충남 대덕군 동면 내탑리 (內塔里)에 있었으나, 1978년 대청댐이 축조되어 수몰(水沒)되면서 9대조 조상을 모셨던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9대조 조상의 묘를 쓸 때에 지관(地官)에게 물어보았더니, 이 곳이 ‘연화부수지지(蓮花浮水之地)의 명당(明堂)’이라고 하였단다. 사람들은 ‘물도 없는 산골에 연꽃이 웬 말이냐’고 지관을 볼기 쳐 내쫓고, 다른 지관을 불러 다시 물어보았단다. 그런데 그 지관 역시 똑 같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아무튼 그런 소리를 들어가며 이 자리에 9대조 묘를 모셨는데, 1978년에 대청댐이 만들어지고 난 후 하늘에서 묘역을 내려다 보니, 500년전 지관들의 말대로 이 곳이 연화부수지지의 명당이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단다. 아무튼 이 종가를 방문하면 누구나 이 곳이 꽃과 산과 집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는 절경(絶景)임을 깨닫게 된다. 그 덕분 이려나? 현재 이 종가 일원은 대전시 문화재 (자료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조 박원종이 연산군(燕山君)을 내쫓고 연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중종(中宗) 임금으로 세운 쿠데타 (政變)를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한다. 이 때 혁명군 사령관이었던 박원종(朴元宗)은 진성대군의 부인 신씨 (居昌愼氏)가 연산 때의 영의정인 신수근의 딸 이라는 이유, 즉 ‘역적의 딸이 국모(國母)가 될 수 없다’는 명분으로 신씨가 왕비에 오른 지 7일만에 폐서인(廢庶人)하여 궁에서 내쫓았다. 실제로는 중종의 왕권이 강화되는 날, 신씨 집안으로부터 받을지도 모르는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박원종 등의 혁명세력에 의해, 즉 타력(他力)에 의해 왕위에 오른 중종은 즉위 초에는 조강지처(糟糠之妻) 마저 지킬 힘이 없었던 것이다.
남편인 중종과 생이별을 하고 내쫓긴 신씨 부인은 중종에게 자기를 기억하고 약속한대로 빨리 환궁(還宮)시켜 달라는 뜻을 전하려는 희망으로 중종이 있는 덕수궁에서 잘 보이는 인왕산 바위에 신혼 때 즐겨 입었던 자주색 치마를 내 걸곤 하였는데, 인왕산의 그 바위를 지금도 치마바위라고 부른다. 중종이 정사(政事)는 돌보지 아니하고 매일 인왕산 치마바위만 넋을 잃고 쳐다보자, 박원종은 치마를 볼 수 없도록 신비(愼妃)를 북한산 고개 넘어 세검정(洗劍亭)으로 내쫓았다. 신비는 결국 생전에 중전으로 복위(復位)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중종은 나라에 해괴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뒤숭숭해지자 여론을 수렴한다는 구실로 “구언(求言)”의 교지 (求言敎)를 내렸다. 응일(應一)의 17대 선조로 당시 순창군수를 지내고 있던 충암(沖菴) 김정(金淨, 1486-1521)은 신비복위를 원하는 중종의 뜻을 간파하고 인근 담양부사인 박상 (朴祥, 충주박씨), 무안현감인 유옥 (柳& 13511;, 문화유씨)과 순창 근교 강천산(剛泉山)에서 비밀리에 회동하여 ‘신비를 내쫓은 건 잘못이므로 복위해야 한다, 임금을 겁박(劫縛)하여 국모를 내쫓은 고 박원종 등 혁명세력을 추죄(追罪)해야 한다’는 상소문(請復故妃愼氏訴)을 작성하였다. 박원종 등 혁명 주동 세력은 이미 사망하였지만, 지금이라도 죄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정의 아호(雅號)는 충암(沖菴) 인데 이는 문자적으로는 ‘빈 절’이라는 뜻이다. 누구나 어렵고 지친 자는 와서 피신하거나 쉴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란다. 충암을 비롯한 3인은 관인(官印)을 소나무에 걸고 신비복위를 맹세하였다. 그 것은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린다는 각오를 나타낸 의식(儀式)이었다. 그들이 내 건 명분은 ‘조강지처(糟糠之妻)는 임금이라도 내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515년 음7월 그믐 충암공이 30세일 때의 일이다.
그러나 3인 중 무안현감 유옥이 외아들이라, 김정과 박상은 “우리 모두는 노부모를 모실 형제가 있으나 자네는 없다. 노친을 봉양할 자가 죽게 되면 효(孝)를 상(傷)하게 되는 것이고 효는 충(忠)을 앞서는 것이니 그대는 동참하지 말라” 이르고 상소문에 유옥의 이름을 빼고 김정과 박상 두 사람의 연명(連名)으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이 올라가자 조정이 발칵 뒤집히고 아직도 실권을 잡고 있던 혁명세력은 ‘이들을 중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부 훈구세력(勳舊勢力)은 ‘임금의 구언에 따라 의견을 제시한 것뿐인데 말이 틀렸으면 그 상소를 따르지 않으면 그만이지 처벌은 불가하다. 이를 처벌한다면 앞으로 누가 임금의 구언에 응하겠느냐? 언로(言路)가 막히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다’ 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결국 상소문의 주동자 두 사람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충암은 곤장 100대을 맞고 8월에 보은 함림역(報恩 含琳驛)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가는 길에 모친이 계시는 보은의 생가(生家)를 지나게 되었다. 충암을 태운 수레가 동네 앞을 지날 때에 충암은 잠시 집에 들러 노모를 뵙기를 부탁하니 도사가 승락하였다. 충암이 수레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동생 역(息菴 易)이 어머니의 서찰(書札)을 건넸다. 서찰을 보니 ‘집에 들어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어머니는 충암의 귀양 행렬이 집 앞을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반드시 에미를 보려고 집에 들리려 할 것인데, 그리 하면 아들이 국법을 어겨 죄가 더 무거워 질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충암은 아우가 건네 준 어머니의 서찰을 읽고 대성통곡하며 어머니 계신 쪽에 절을 올리고 수레에 다시 올랐다.
이듬해 3월 정암 조광조 등의 신진사림(新進士林)의 구원에 힘입어 9개월만에 방면(放免)되었는데 이는 임금의 구언(求言)에 따른 자를 처벌한 것은 명분도 없고 무리였음을 주장한 사림세력의 승리였다. 충암은 방면된 후 정치에 염증을 느껴 속리산과 금강산에 칩거하고자 하였으나 조정암의 끈질긴 권유로 중종 14년 기묘년 (당시 34세)에 형조판서에 오르게 되었다. 그 때 충암은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하였다. 위훈삭제란 중종 반정 때 허위로 공신록(功臣錄)에 이름을 올린 가짜 공신의 친인척을 가려내어 이들에게 준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자는 것으로, 중종반정의 공신인 혁명세력의 전횡을 막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 작업이었다. 그러나 충암은 중종의 우유부단(優柔不斷) 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혁명세력의 역공을 받아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 이것이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유명한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한편 담양부사 박상은 전라도 남평으로 귀양간 후 이듬해 11월 방면되어, 기묘사화 당시 순천부사로 개혁에 역할을 하였으며, 유옥과 함께 비교적 순탄한 관직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기묘사화 때 충암은 목숨만은 보전하여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는데 지척인 보은(報恩) 생가에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군수 정웅의 허락을 받고 일시 귀가 하였으나, 어머니는 죄인이 배소(配所)를 떠나 온 것은 불충이라며 아들을 만나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귀양지로 다시 돌아 가던 충암은 노상(路上)에서 한양에서 내려온 금부도사(禁府都事)와 맞부닥치게 되었다.
금부도사는 김정의 귀양지가 금산에서 진도(珍島)로 변경됨에 따라 그를 진도로 압송하려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한양에서 내려온 금부도사에 겁을 먹은 금산군수는 자신은 김정의 일시 귀가를 허락한 바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충암은 ‘도망자가 스스로 귀양지로 돌아오는 법이 있겠느냐’고 해명하였으나 무위(無爲)로 그치고, 진도보다 훨씬 더 먼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1520년 8월의 일이다.
그러나 충암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계속 제주도로 모여들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조정은 제주도에 들어온 지 14 개월만인 1521년 10월 그믐에 사약(賜藥)을 내렸다. 사약을 앞에 둔 충암은 제주에 와 있던 동생에게 노모 봉양을 당부하고 술을 한잔 청해 마신 후 유명한 임절사(臨絶辭)를 지어 제주 목사(牧使)에게 주고 북향사배(北向四拜) 후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하였다. 동생은 형을 걱정하는 어머님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해 형의 근황을 알아보려고 마침 이 때 제주도에 와있었던 것이다. 임절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投絶國 兮 作孤魂 외딴섬에 버려져 외로운 넋이 되려 하니 遺慈母 兮 隔天倫 어머님을 두고 감이 천륜을 어겼구나 遭斯世 兮 隕余身 이 같은 세상을 만나 이 몸이 죽게 되었으니 乘雲氣 兮 歷帝& 38333;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 옥황상제의 문에 이르리라 從屈原 兮 高逍遙 굴원(屈原)을 따라 높이 떠돌고도 싶으나 長夜冥 兮 何時朝 기나긴 어두운 밤은 언제 날이 새리 烱丹衷 兮 埋草萊 빛나던 일편단심 쑥밭에 묻게 되니 堂堂壯志 兮 中道& 25703; 당당하고 장하던 뜻 중도에 꺾였구나 嗚呼 千秋萬歲 兮 應我哀 아! 천추만세(千秋萬歲)에 나의 슬픔을 알리라
충암이 죽은 후 제주민들은 자제(子弟)의 교육을 위해 김정 배소(配所) 자리에 귤림서원(橘林書院)을 세웠는데 훗날 제주명문 오현고(五賢高)로 바뀌었다. 충암은 제주 유배기간 중에 “제주 풍토록(風土錄)”과 “우도가(牛島歌)”를 남겼는데, 지금도 우도(牛島)에 가면 우도팔경(牛島八景)중 하나인 경안동굴 (鯨岸洞窟, 고래콧구멍 동굴) 입구에 제주시가 세운 “우도가 (牛島歌)” 시비(詩碑)가 서있다. 유튜브에 “우도가비제막식 (http://youtu.be/xuVZR9R7IAc)”을 검색하면 응일이 시비 제막식에서 우도가 원문을 낭송하는 영상이 나온다.
충암은 사약을 받은 지 24년 뒤인 1545년 (인종원년)에 복권(復權)이 되었다. 그리고 사림(士林)들의 약 200년간에 걸친 끈질긴 상소 끝에 1790년 (정조14년)에 임금으로부터 불천위(不遷位)의 윤허(允許)를 받았다. 불천위란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학식이 풍부하여 백성의 본보기가 되는 자에게 임금이 내리는 은전(恩典)이다.
일반적으로 사대부(士大夫) 양반 집에서는 돌아 가신 4대 조상까지는 사당(祠堂)에 위패 (位牌, 神柱)를 모시고 돌아가신 날에 방안에서 제사를 지낸다. 이를 기제사(忌祭祀) 또는 방안제사라고 한다. 5대 이상의 조상에 대해서는 신위(神位)를 사당에서 묘소(封墳)앞으로 옮겨(즉, 遷位) 땅에 묻고 (埋安) 그 후로는 돌아가신 날이 아닌 정해진 날 (歲日)에 묘제(墓祭)로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이를 시향(時享), 시제(時祭), 또는 세일사(歲一祀)라 부른다. 그런데 불천위를 받으면 4대가 넘어도 신위를 묘소 앞으로 옮기지 아니하고, 후손이 끊어질 때까지 사당에 모시고 영원히 돌아가신 날에 방안제사를 받들게 된다.
1521년 충암공이 제주에서 사사(賜死)되자 부인인 은진 송씨 (恩津 宋氏)는 남편을 따라 자진(自盡)하려 하였으나 노모가 생존해 계시므로 실행하지 못하고 노모를 봉양하였다. 그러다가 노모가 돌아가시자 8일간 곡기(穀氣)를 끊음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송씨는 “집 어른의 참화(慘禍)는 천고(千古)에 지극히 원통한 일이다. 신비 복위를 청한 것은 진실로 윤리강상(倫理綱常)을 북돋우고 세상 사는 바른 길을 위한 고심에서 나왔는데도 말이 끝내 실행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화(禍)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신(愼) 중전의 억울함이 풀려 복위되기 전에는 비록 백대가 지나더라도 충암의 신주를 매안(埋安)하지 마라. 즉 불 천위 (不 遷位)하고 기제사(忌祭祀)로 모시며 그 날을 기다려라“고 유언하였다.
이는 불천위를 받지 아니하면 ‘4대까지만 신주를 사당에 모실 수 있다’는 국법에 위배되는 당부이었다. 이 말씀을 들은 후손들은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유언을 지켰는데, 이런 송씨 부인의 절행(節行)을 알게 된 순조 임금은 1803년 (순조 3년)에 송씨 부인에게 정려문(旌閭門)을 내렸다. 충암공이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음으로써 경주 김씨 충암공파(派)의 파 시조(派 始祖)가 된 1576년 (선조 9년)으로부터 약 200여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요약하면, 충암은 중종 16년인 1521년 10월 그믐에 돌아가시고, 24년 후인 1545년 (인종 원년) 6월에 임금의 유언으로 관작(官爵)을 회복하는 복권을 하였다. 선조9년 1576년에는 임금으로부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이는 학문이 넓고 남의 말을 경청 (博學多聞)한다는 의미의 문(文)과, 몸가짐이 정중하고 남을 대하는 태도가 대범하고 관대 (居敬行簡)하다는 의미의 간(簡)을 합친 말이라고 한다. 그 후 1790년 (정조 14년)에는 임금으로부터 불천위 윤허를 받았다. 응일의 집안이 종가(宗家)가 된 것은 당연히 충암공 사후인 1521년부터 이지만, 자타 (自他, 임금과 백성)가 인정하는 자랑스럽고 명실상부한 종가가 된 것은 정조 임금으로부터 불천위를 윤허(允許) 받은 1790년 (정조 14년)부터 이다.
종가(宗家)의 최대 덕목(德目)은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다. 이는 훌륭한 어른의 제사를 잘 받들고 고인을 기리기 위해 찾아 오는 손님을 대접하라는 뜻인데, 자랑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만만치 않은 비용이 소요된다. 여기에서 빈(賓)이란 찾아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 오라는 허락을 받은 손님을 말하고, 객(客)이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나그네 같은 손님을 말한다. 빈에게는 예컨대 수정과를 대접할 수 있지만 객에게는 수정과를 대접할 수 없다고 한다. 수정과는 단맛을 내기 위해 하루 전에 곶감을 넣고 우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불천위를 받은 집안에 봉제사 접빈객을 잘 하라고 노비(奴婢)와 함께 4파지지 (四波之地,)의 넓은 땅을 하사한다. 4파지지란 ‘징을 쳐서 들리는 곳까지, 또는 밤에 횃불을 켰을 때 횃불이 보이는 지경까지의 넓은 땅’을 말하는 것으로, 사실상 그 일대의 땅 전부를 의미한다. 이처럼 넓은 땅을 주는 대신 종가 인근 100리 내에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면 그건 종가의 책임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일종의 우리 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충암공이 정조 때에 불천위를 받게 된 것은 후학(後學) 유림(儒林) 들이 약 200년에 걸쳐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200년에 걸친 상소! 오늘날의 호흡으로 200년에 걸쳐 어떤 일을 도모하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조상들의 긴 호흡이 충암공의 충절만큼이나 우리를 감동시킨다.
이에 더하여 또 하나 감동적인 일은 응일이 어렸을 때에, 즉 아버지 16대 종손 시절에 일어났다는 일이다. 어느 날, 상소문을 쓸 당시에 외아들이라 상소문에 이름을 넣지 않아 목숨을 부지하고 고난을 겪지 아니한 무안현감 석헌(石軒) 유옥 (문화 유씨)의 후손들이 물어 물어 수소문 끝에 충암공 종손인 응일의 아버지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단독으로 소유하고 있던 강천산의 문서를 내보이며 응일의 부친에게 공동으로 소유권을 등기하자고 제안하였다고 한다. 강천산은 충암 등 세 사람이 결의를 하고 상소문을 쓴 장소로, 훗날 조정은 세 사람의 충절을 인정하여 유옥 집안에게 하사(下賜)한 산이라고 한다. 그 때부터 1970년대까지 약 450년간 그 땅은 쭉 유옥의 후손인 문화 유씨 종가의 땅이었다. 유옥으로부터 충암공 등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들었던 유옥의 후손들은 그 유지(遺旨)를 잊지 않고 전승(傳承)하다가 응일의 부친 때에 그 은혜를 갚기로 작정하고 산(山) 문서를 들고 온 것이었다. 450년 전 조상의 유언을 스스로 받들어 산 문서를 들고 찾아 오다니! 온갖 신의(信義)와 염치(廉恥)가 땅에 떨어진 오늘날, 유옥의 후손들이 행한 보은(報恩)은 깜깜한 밤 하늘에 샛별과 같은 빛을 발해주고 있다. 이 사건은 ‘과연 뼈대 있는 집안은 어떻게 다른가’를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오늘날에도 신비의 친정인 거창 신씨 문중은 신비의 복위를 상소하였던 김, 박, 유 3문중에게 감사함을 표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 박원종 가문과 신씨 문중은 오늘날 어떤 관계에 있을지 살짝 궁금해 진다. 상소문 작성의 무대였던 강천산은 오늘날 순창군의 군립공원(郡立公園)이 되었다. 맨발로 걷는 산책코스, 세 사람(순창, 담양, 무안 고을수령)이 관인(官印)을 걸어놓고 맹세한 늙은 소나무, 그리고 비각(碑閣)인 순창 삼인대(三印臺)와 강천사(剛泉寺)는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이 드나드는 명소가 되어 있다. 또한 상소문을 작성했던 음력 7월 그믐날엔 매년 순창군 주관으로 “삼인문화축제(三人文化祝祭)”가 열리는데, 그날 충암공(忠菴公)의 17대 종손인 응일은 순창군수로 분장하여 눌재(訥齋) 박상의 종손 및 석헌(石軒) 유옥의 종손과 더불어 상소문을 작성하는 행사 등을 재현하고 있다. 진리는 오래되어도 결코 고리타분해지지 않는다는 교훈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길 기원해 본다. 새삼 응일의 친구됨이 자랑스러워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