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뛰어보니 달라졌다"…러너들이 찾는 성지약국
- 김지은 기자
- 2026-08-31 11:57:47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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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라 약사(서울 영등포구 삼남매약국)
- 40살 가까워 시작한 달리기 6년…풀코스 최고기록 3시간19분
- 새벽 러닝크루 5명서 70명으로…약국도 '러너 특화' 공간 변신
- 철분·진통제부터 부상·영양상담까지…"좋아하는 일과 약사 전문성 만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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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팜=김지은 기자] "예전 같으면 '무릎이 아프다'는 말에 소염진통제부터 생각했을 겁니다. 지금은 먼저 물어요. 얼마나 뛰세요? 대회는 언제예요?"
약사가 달리기를 시작하자 약국 상담도 달라졌다. 철분제를 찾는 러너에게는 단순히 제품을 건네기보다 대회가 언제인지, 최근 검사 수치는 어떤 지부터 묻는다. 장거리 대회를 앞두고 다리가 아프다며 진통제를 찾는 환자에게는 약으로 버티며 뛰는 것보다 쉬어야 할 때가 있다는 이야기를 먼저 건넨다.
서울 여의도에서 삼남매약국을 운영하는 정보라 약사(46·서울대)는 러닝계에서 이제 본명 만큼이나 '런약사'로 익숙하다.
풀코스 최고기록은 3시간19분, 하프마라톤은 1시간33분, 10㎞는 41분. 마흔을 앞두고 사실상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의 기록이라고 하기에는 선뜻 믿기 어려운 수준이다.
하지만 정 약사에게 기록보다 더 큰 변화는 따로 있었다. 2019년 달리기 시작 이후 6년. 러닝은 세 아이의 엄마와 약사라는 좁은 생활반경에서 지쳐가던 그에게 온전히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만들어줬다. 그 경험은 다시 환자 상담으로 이어졌고 평범했던 동네 약국은 어느새 멀리서 러너들이 찾아오는 특화약국으로 변했다.
정 약사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어느새 약국에 접목됐다. 정말 좋아하고 계속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달리기와 약사라는 일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세 아이 키우며 하루 종일 약국…새벽 러닝이 터닝포인트로
정 약사가 현재 약국을 연 것은 2019년. 20대에 개국 경험이 있었지만 세 아이를 낳은 뒤 약국 일을 한동안 쉬었다. 다시 문을 연 약국은 처음부터 '명당'은 아니었다. 집이 가깝고 아이들의 학교와 유치원이 인근에 있다는 이유로 음식점이었던 자리에 개국을 결심했다.
"아이 셋을 키웠으니 동네에 아는 사람도 많고, 지인들이라도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새로 생긴 약국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렵더라고요."
개국 초기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자리를 지켰다. 일요일에도 문을 열었다. 근무약사 없이 하루 대부분을 혼자 약국에서 보내는 날도 많았다.
문제는 몸과 마음이었다. 퇴근하면 늦은 저녁을 먹고 곧바로 잠들었다. 생활반경은 집과 약국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체중이 빠르게 늘었다. 아침에 다시 약국으로 향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로 느껴질 정도로 지쳤던 때 만난 것이 달리기였다.
"아이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친구가 같이 뛰어보자고 제안했어요. 그래서 엄마 다섯 명이 새벽 5시30분에 모여 뛰기 시작했죠.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달리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어요."

그때의 경험 때문일까. 누군가에게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5명으로 시작했던 모임의 이름이 '눈 떠지면 달리자', 일명 '눈떠달'이다. 지금은 약 70명이 함께한다. 매일 새벽 원효대교 인근에 가면 누군가는 뛰고 있다. 가입비도, 거창한 운영규칙도 없다. 새벽 5시30분이라는 약속만 있을 뿐이다.
특히 이 모임에는 40~50대 여성들이 많다. 정 약사는 "젊은 남성 중심이거나 저녁에 활동하는 러닝크루는 많지만 40~50대 엄마들이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며 "혼자 뛰기는 싫고 어디에 가야 할지 모르던 분들이 하나둘 찾아왔다"고 했다.
1㎞도 힘들었는데 풀코스 3시간19분…"꾸준함'이 바꿨죠"
정 약사는 달리기 전까지 제대로 운동을 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가 우선이었고 세 아이를 연달아 키우면서 운동은 더 멀어졌다. 처음 1년가량은 하루 30분, 5㎞ 안팎을 뛰었다. 하지만 새벽 한강으로 나가는 그 시간이 좋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잖아요. 아무도 깨지 않은 조용한 새벽에 혼자 나와 뛰는 게 정말 행복했어요. 1㎞도 못 뛰던 내가 5㎞를 뛰고, 10㎞, 20㎞를 뛰는 게 너무 신기했고요. 하루아침에 늘지는 않아요. 그런데 계속 하면 1년 뒤에는 분명히 달라진 내가 보여요. 저는 이런 경험 자체가 처음이었어요."


첫 공식대회 출전은 러닝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난 2022년이었다. 코로나19 기간 대회가 중단된 탓도 있지만 당시에는 기록이나 SNS에 큰 관심 없이 그저 뛰는 것 자체를 즐겼다. 오히려 정 약사는 이것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중요한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최근 러닝 열풍으로 입문 몇 개월 만에 기록과 대회에 몰두하는 초보 러너들이 많지만 그는 서두르지 말라고 조언한다.
정 약사는 "3개월 뛰고 10㎞ 대회 목표기록을 정해오는 분들도 있는데 어차피 평생 뛸 생각이라면 1~2년 천천히 뛰어도 된다"며 "SNS에서 다른 사람 기록과 비교해 빨리 따라가려다 보면 부상이 찾아오기 쉽다. 나 역시 3년을 꾸준히 뛰고 나서 대회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쌓인 6년의 결과가 풀코스 3시간19분이다. 하프 최고기록은 1시간33분, 10㎞는 41분까지 단축했다. 정 약사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기록이다.
"40살 가까이 돼 달리기를 시작했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기록이 좋아지고 있어요. 저도 그게 너무 신기해요. 그래서 누구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철분제 주세요"에서 끝나지 않는다…'러너의 몸' 이해하는 상담
정 약사의 달리기는 어느 순간 약국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부터 러닝 특화약국을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러닝크루가 커지고 유튜브와 SNS를 통해 정 약사를 알게 된 러너들이 하나둘 약국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기 약국이 어디예요?'라는 DM이 계속 왔어요. 한 명이라도 러너가 찾아오면 저는 너무 좋죠. 달리기 이야기만 해도 너무 재미있으니까요."

2년 여 전부터는 아예 약국에 '러너를 위한 약국'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간판과 공간을 손보고 자신이 실제 사용해 본 제품과 러너들이 찾는 품목을 별도로 구성했다. 러닝 콘텐츠를 통해 약국이 알려지면서 타지역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생겼다.
하지만 정 약사가 생각하는 러닝 특화약국의 핵심은 제품이 아니다. 상담의 질문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정 약사는 "러너가 철분제를 찾으면 '대회가 언제냐'고 묻게 된다"며 "검사수치를 가져오는 분도 있고, 그 사람의 일정과 상태를 보면서 상담의 방향을 달리하게 됐다"고 했다.
진통제 상담에서도 변화가 컸다. 달리다 무릎이나 발목이 아프다고 하면 무조건 약으로 통증을 눌러 뛰도록 하기보다 현재 훈련량과 대회 일정을 확인하고 휴식이 필요한 상황인지부터 생각한다. 특히 장시간 달리는 러너가 진통제를 습관적으로 복용하며 운동하는 문제에 대해 정 약사는 경계하는 편이다.
그는 "예전이라면 '달리고 나서 아프다'는 이야기에 소염진통제를 먼저 생각했을 수 있지만 지금은 얼마나 뛰는지, 대회를 앞둔 상황인지를 먼저 묻는다"며 "약을 먹어가며 무리하기보다 쉬어야 할 상황이라면 쉬도록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직접 뛰면서 더 많이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정 약사에게는 러너들이 기록에 집착하며 부상을 감수하는 심리도 낯설지 않다. 대회를 앞두고 쉬면 그동안 훈련한 것이 사라질 것 같아 불안해하는 마음을 자신도 경험했기 때문이다.
"뛰지 않는 사람은 '아프면 그냥 쉬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대회를 준비한 러너는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아요. 그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지금은 쉬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바로 이 대목이 정 약사가 생각하는 '뛰는 약사'의 강점이다. 약학 지식만으로도, 러닝 경험만으로도 부족하다. 두 경험이 만났을 때 러너의 말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 약사 약국에는 이제 러닝 상담을 받기 위해 전화로 방문 가능 여부를 묻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정 약사는 현재 SNS와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달리기와 약학 정보를 알리고 있다. 유튜브 구독자도 인터뷰 당시 1만3000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그는 '특화'를 위해 억지로 무언가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생각해보면 결국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걸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이걸로 돈을 벌어야지', '우리 약국을 특화해야지'라고 시작한 게 아니었거든요. 제가 달리기에 너무 진심이고 정말 좋아하니까 그냥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달리기가 깊어질수록 오히려 약학 공부에 대한 갈증도 커졌다. 정 약사는 2004년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출산과 육아 등으로 오랜 기간 경력이 단절되거나 약학 공부에 충분한 시간을 쏟지 못했다는 게 스스로의 평가다. 러닝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다시 책을 펼치고 있다.
"약 이야기를 더 제대로 하고 싶어요. 저는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졸업한 지 오래됐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시간도 있으니까 지금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포츠약학 분야에도 관심을 두고 관련 약사들과 교류하고 있다. 러닝과 약학을 결합한 콘텐츠도 조금씩 늘릴 생각이다.
정 약사는 자신을 전문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40대 여성이 뒤늦게 시작해 매일 조금씩 성장했다는 점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저는 지금도 더 잘 뛰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제 인생에서 몇 번 없는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달리기도, 유튜브도 최선을 다해보고 싶어요."
그가 앞으로 가고 싶은 방향도 결국 그 연장선에 있다. 기록만 빠른 러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시행착오와 약사의 전문성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이 조금 더 오래, 건강하게 달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저도 누군가의 권유로 달리기를 시작했고 그게 제 인생을 바꿨잖아요. 그래서 저 역시 누군가에게 달리기가 얼마나 좋은지 알려주고 또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요. 그것이 제가 매일 새벽 달리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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