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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스터디

약과 의료의 조작주의 극복을 위하여

  • 데일리팜
  • 2013-04-22 06:30:00
  • 신광식(보건학 박사, '불감사회' 저자)

한때 구습과 편견으로부터 해방의 메시지였던 실증주의는 지배적 권력이 되고부터는 조작주의라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정신병 환자를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하는 편견으로부터 그것을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배격하여야 한다는 대목에서 실증주의-근대의학은 확실히 해방의 전도사였다. 하지만 조작주의로 나타난 약과 의료는 환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횡포의 메카니즘이 된다. 조작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는 소유의 방식에 기반 한다. 앞마당에 핀 꽃도 내 마당이 아닌 곳에 핀 것이라면 만족할 수 없고 꺾어다 내 방안에 놓음으로써 비로소 행복해지는 현대인의 모습은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조작된 욕구에 의존하는 삶을 잘 드러낸다.

소유에 의존하는 왜곡된 욕구는 소비라는 형식을 필수적으로 구성하지만 정작 소비자 자신이 필요로 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시된다. 이러한 사정은 대상을 인지하고 평가하기 어려운 약과 의료에서 더욱 심해진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약과 서비스의 소비과정은 치열한 경쟁에 기반한 일차원적 서열관계로 편성된다. 이 경쟁관계 속에서 갈등과 다툼이 일상적으로 되지만 그 경쟁의 승리자라 해도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마르쿠제는 억압과 조작이라는 현실의 대척점에 자유와 상품 및 서비스의 질, 자기결정권 같은 가치를 대비시킨다. 자유는 여가시간과 다른 것이라고 하면서 산업사회 속에서 여가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시간은 감소한다고 말한다.

하루 종일 경쟁과 스트레스에 ?기며 각박해진 도시생활에 찌든 현대인은 문득 무언가 잃어버렸음을 깨닫곤 한다. 내 몸을 돌보겠다는 의지로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만 그 대부분은 자기 몸과 관련 없는 부분에 낭비된다. 처방된 수많은 약이 사실 소비조차 되지 않은 채 그대로 버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급자는 산업적으로 많은 환자를 특정한 약과 의료의 소비자로 연결시키지만 '번역'된 조작주의 약과 의료는 환자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멀어진 것이기 쉽고 그 미스매칭은 필연적으로 낭비를 발생시킨다.

조작주의 환경에서의 약과 의료가 질 높은 것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환자의 신체적 구체성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환자의 구체성은 조작적으로 마련되어 세팅된 기성의 약과 의료의 적용대상이 되는지만 고려될 뿐이기 때문이다. 신체의 자기결정권 주장에 대하여 조작주의는 말한다. '네 몸이 필요한 건 이미 내가 다 알아서 마련해 놨으니 너는 그저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네가 아무리 궁리를 해도 내가 마련한 것 이상을 얻을 수 없다….' 신체의 자기결정권은 조작주의가 이렇게 쉬운 논리로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위한 사려 깊은 영양섭취를 ‘섭생’이라는 용어로 중시한다. 하지만 유기체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하는 같은 행동이지만 어느 때는 ‘양육’이라는 말을 쓰고 동물에게는 ‘사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최근의 축산업은 양질의 육질을 얻기 위해 한방약과 각종 영양성분을 함유한 사료를 최선의 '음식'으로 제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육이 섭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개의 개념에서 중요한 차이는 신체의 '자기결정권'이며 그것이 없는 한 사육이 섭생이 될 수는 없다.

한 환자에게 처방돼 그대로 버려지는 약: 조작주의적으로 강요된 처방과 환자요구의 미스매칭은 필연적으로 낭비를 초래한다.
조작주의에 경도된 인간의 언어세계는 '...하여야 한다.'와 같은 당위적 표현이 범람한다. 실증주의에 의존하는 정답이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선택을 대신하고 선택권은 포기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표현은 조작주의를 대표하는 언어방식이다. 이러한 표현은 약과 의료의 세계에서 더욱 범람한다.

우리는 이미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병원에서 죽지 않을 권리, 치료받지 않을 권리, 혹은 다른 방식으로 치료받을 권리, 병원이 아닌 집에서 분만할 권리 등을 상실하고 있다. 역경 속에서 훌륭한 선택과정으로 채워진 위대한 인생 스토리는 이제는 낯 선 것이다.

현대인은 수동적이고 무력한, 초라한 모습만으로 남아있다. 의료와 약에 있어서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주체자’의 지위를 박탈하는 것은 설사 결과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제공한다 해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이 글을 조작주의 사회가 만드는 억압이 수많은 사회 구성원을 자살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하였다. 우울증이라는 조작주의적 솔루션이 자살의 근본적 대책이 아니고 약과 의료 역시 개인을 그렇게 질식시키는 전체주의적 억압과 통제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마르쿠제의 진단과 시각은 이미 50여년이 흐른 것이지만 우리가 충분히 조명하지 못한 후기 산업사회의 이러한 특성을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조작주의가 막아놓은 시각의 제한을 철폐하여야 한다. 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편협하게 제한시킨 과학의 범위를 확대하기 위하여 이미 역사 속에서 인류의 생태학적, 문화적 다양성속에 실현되었던 수많은 업적들이 존재하는 패러다임의 ‘저넘어’를 방문하여야 한다. 다원성과 함께 복원되어야 할 것은 마르쿠제의 이차원성, 즉 변증법적 관계이다. 사물이 변증법적 관계 하에 있을 때 긍정과 부정은 변화의 역동성의 세계를 회복한다. 기성의 약과 의료가 무조건적 솔루션이 아니라, 효과의 제한성과 부정적 영향을 동시에 고려하고 토론하여야 할 대상이 된다. 환자는 무능하고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현명하고 주체적인 약과 의료의 주인의 자리를 회복해야 한다. 정보의 능동적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치료영역을 넘어선 일상의 설계자이자 실천의 주체이어야 한다. 인간의 본연의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말고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여야 하며 조작적 ‘번역’을 거부하여야 한다. 이렇게 보면, 이 과정으로라면 최소한 의사의 진료가 3분, 혹은 30초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약사의 복약지도 역시 훨씬 더 길어지고 풍부해져야 한다. 약사가 제공하는 복약정보는 조작주의의 환자 무능화 전략에 대한 효과적 대응이 될 수 있다. 세팅된 의료적 과정에 단순한 판별만 하는 과정이라면 3분의 의료도 사실 긴 시간이다.

산업적으로 준비되었고 더 이상의 고려사항이 없다면 짧은 진료는 효율성의 요체이고 산업적 이익의 원천이다, 처방된 약이 무조건적인 단순 복용이 최선의 결과가 얻어진다고 한다면 복약지도 역시 간단히 끝낼 수 있고 역시 약국의 산업적 이익을 늘릴 것이다. 이 글은 약과 의료가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 환자와 의사, 약사가 더 높은 차원의 교감과 상호작용, 실천으로 재구성 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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