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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의사, 한국와서 외과전문의로 완생

  • 이혜경
  • 2015-01-30 12:24:59
  • 요약
  • 고윤송 씨 "탈북 자수후 의사국시 치러"

단지 도움이 필요했다. 고윤송(41) 씨가 2001년 첫 탈북을 결심한 이유다. 결과는 실패. 중국에서 열흘 만에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다.

드라마 틱한 이야기다. 실제 북송된 고 씨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고초를 겪었다. 한 달만에 풀려났다.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먹고 살기 힘들어 탈북했다는 이유가 정상 참작됐다.

고 씨는 원래 자리인 평안남도 북창군병원으로 돌아갔다. 5년 간 결핵환자를 진료하던 장소다. 그 곳에서 다시 2년 간 환자를 진료하다, 2003년 2차 탈북을 하게 된다.

"형님 따라 들어간 의대"

고 씨의 아버지는 공산당 간부였지만, 청렴결백을 자랑했다고 한다. "우리는 간부 집안이면서, 왜 먹고 살기 힘드냐"는 것이 고 씨가 달고 사는 투정이었다.

북한은 초등학교 4년, 중학교 6년을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한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딱히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없다던 고 씨.

그는 6살 터울의 둘째 형을 따라 의대를 갔다. 고 씨는 4형제 중 막내다. 3시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에서 고 씨는 둘째 형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다. 고 씨가 자랑스러워 하는 둘째 형은 북한 외과의사다.

고 씨도 둘째 형 처럼 외과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북한의 중앙집권제 인력관리 체제 때문에 결핵과로 배정됐다. 스스로 전문과를 선택할 수 없었다.

북한의 결핵과는 대부분 청진, 촉진, 타진으로 결핵환자를 걸러내고, 엑스레이와 혈액검사로 입원 및 외래 환자를 구분한다. 고 씨의 결핵과에 대한 싫증은 엑스레이 때문에 시작됐다.

엑스레이 장비가 우리나라 처럼 필름으로 찍어 판독하는 형태가 아니라 의사와 환자가 직접 기기가 있는 암실에 들어가 방사선에 그대로 노출된 채 판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방사선 노출이 엄청났다"며 "힘들고, 짜증나는 순간 외과의사로 소문난 형님의 수술을 구경하고 나서부터 외과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됐다"고 말했다.

"2차 탈북, 3년 간 마네킹 공장에서 근무"

결핵과에서 외과로의 전환 실패, 그리고 공산당 입당을 위한 노동단련 과정에서 육체적 고통으로 고 씨는 탈북을 결심하게 된다.

첫 탈북에서 열흘 만에 잡혀 북송됐지만, 2003년 2차 탈북은 마네킹 공장에 취직하면서 오랫동안 중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용접, 도색, 마네킹 제작 및 인테리어를 배웠다. 하루에 20시간 이상 일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놀았다. 탈북자로서 불법 노동자였기 때문에 신분증이 없어 저축은 못했다.

북한에 남은 가족을 위해 한국행은 꿈도 못꿨다. 더 이상 가족에게 죄인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거지 같이 살다가 죽더라도 중국에서 죽자"고 다짐했던 고 씨. 하지만, 3년 이상 절망과 같은 삶이 이어지고, 노동자로서 대접 받지 못하자 한국에 가서 돈을 벌자고 결심하게 된다.

처음에는 조선족 불법 노동자 처럼, 조용히 밀입국 했다가 출국할 계획으로, 2007년 중국에서 한국으로 보내지는 마네킹이 실린 콘테이너 박스에 몸을 숨겼다.

수동드릴로 컨테이너 박스에 구멍 3개를 뚫어 숨을 쉬고, 빛을 보며 이틀에 걸친 항해 끝에 항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콘테이너 박스가 배에서 내려지지 않았다. 중국 마네킹 공장 사장이 고 씨가 사라진 것을 알고 통관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굶어죽겠구나"는 생각으로 3일을 버틴 고 씨. 중국 사장이 고 씨를 놓아주겠다고 생각했는지, 통관신고를 마쳤고 그제서야 콘테이너 박스는 트럭에 옮겨져 목적지로 향했다.

"탈북 자수 후, 의사국시 치러"

북한에 남은 가족들을 위해 탈북 자수를 원하지 않았던 고 씨.

중국에서 만난 적 있던 한국 공장 사장의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나중에 발각돼 간첩으로 오해를 받으면 도와준 사장까지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결국 자수를 택했다.

그 당시 그의 주머니에 있던 전 재산은 중국 돈 5원. 3년 간 중국 마네킹 공장에서 일한 전 재산이다.

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고 씨는 자수 후 모든 조사를 끝내고 정착금과 거주지를 지원 받았다.

꿈은 한 층 더 커졌다. 북한의사 출신으로서, 한국에서 할 수 있는게 없을까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탈북의사의 경우 북한의 의대졸업을 인정, 국시원 면접을 통해 실무경력이 인정되면 의사국시를 치를 수 있다. 면접을 통과한 고 씨는 의사국시를 준비하면서 거주지 인근에 있던 고대의대 도서관을 찾았다.

고려대학교는 고 씨에게 낯설지 않았다. 북한방송을 통해 1980년대 한국의 학생시위가 방영된 적 있는데, 그 장소가 고려대학교 앞이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인연은 닿는다 했을까. 고 씨는 고대의대 예방의학과 이원진 교수의 도움으로 임시 출입증을 발급 받아 의대 도서관을 이용, 한국어로 번역된 의학서적을 빌려 의사국시 공부를 했다.

첫 번째 국시는 불합격. 다음 해 국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실기시험 도입이라는 변수가 나타났다. 하지만 김신곤 내분비내과 교수가 의대생들과 함께 실기시험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와줬다.

고 씨는 두 번째 치른 2010년 의사국시에서 합격했다. 인턴, 레지던트 수련은 고대병원에서 했다. 올해 외과 전문의 시험을 합격, 2월부터는 외과 전임의로 고대안산병원에 출근한다.

고 씨는 "도움을 받고 은혜를 입은 만큼, 모자란 능력이지만 돌려주고 싶었다"며 "외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만큼 수술을 잘해서 많은 환자를 살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더 큰 꿈, 자신의 고향인 북한 주민을 위한 외과의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도 드러냈다.

"북한 사람들은 배고픈 것도 고통인데, 아프기 까지 해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죠. 그들에게서 아픈 것 만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간이식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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