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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선] 한국바이엘, 국내 영업 영욕의 50년

  • 노병철
  • 2018-08-02 06:29:50

독일계 글로벌 빅파마 바이엘이 국내 제약산업에 본격 진출한 시점은 1972년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생산공장을 설립하면서부터다. 지금의 씨트리 공장이다. 당시 사명은 바이엘약품으로 초대회장은 지분 51%(초기 지분 2억원대)를 투자한 고(故) 안인혁 회장이다. 이북 출신인 안 회장은 1940년대 해충·농약 도소매업으로 막대한 부를 이룬 인물로 한독약품 초창기 지분투자자로도 널이 알려져 있다. 이후 1990년대 중반 안 회장은 바이엘과 지분을 정리하고, 남양주 공장 인수 후 씨트리에 월 2500만원의 임대료 받고 사실상 본업에서 손을 땐다.

씨트리에 남양주 공장을 매각하기 전인 '90년대 중반까지 바이엘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해열제 아스피린, 무좀약 카네스텐, 소화제 탈시드, 유도마취제 에폰톨, 진경제 네비스콘·콤미탈, 당뇨병치료제 리카놀·바이카론, 고혈압치료제 아달라트·벤디곤·바이프레스, 영양제 캄포페론B, 심장 절개 후 접합제 트라시롤, 피부연고제 바이브텐 등 20여개에 달했다. 이후 국내 자체 생산 제품들은 공장 매각 영향으로 수입완제 또는 위수탁으로 대체되는 길을 걸었다.

2010년 초반 쉐링 인수에 따라 안성산업단지에 위치한 지금의 CT조영제 울트라비스트 전용 공장도 자연스럽게 바이엘 차지가 됐다. 울트라비스트는 한때 국내 생산실적 800억원에 달할 정도로 조영제 시장 리딩 품목으로 군림했다. 지금은 GE헬스케어와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쉐링을 인수하기 전, 바이엘도 일부 조영제 품목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보다는 아그파라는 엑스레이·CT 필름 사업부의 명성이 더 컸다.

바이엘에서 평생을 몸담은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70년대 당시 국내 진출 조건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박정희 독트린, 즉 경제개발정책에 기인해 외국기업이 국내에서 영업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한국인(개인·법인) 지분 51% 확보와 공장 설립 그리고 기술 전수 등의 요건을 충족해야 했다. 혜택 위주의 지금의 외국인투자촉진법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외국법인의 시각에서는 국가의 개입을 넘은 초월적 계획경제로 강력한 경제부양정책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바이엘은 과연 무엇을 보고 한국 진출을 결정했을까. 바이엘은 큰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전략과 전술은 적중했다. 바이엘 초창기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에 파견된 부사장급 지사장은 30년 뒤 국내 공장철수를 거론했다고 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 국내 제약기업 수준이 상당한 역량을 확보할 것이라는 것도 예견했다. 글로벌 기지에서의 대량생산에 따른 원가절감, 품질관리 용이성 측면에서 수입완제와 위수탁이 여러모로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바이엘은 이미 반세기 전에 알면서도 인내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특히 강성 제약노조에 대한 반감은 '7·80년대 당시 독일 지사장들의 스트레스 요인 1위였다고 회고할 정도다.

'70~'90년대 바이엘약품 지사장 현황을 보면 초대 클레트 부사장을 시작으로 마출라트·바우어·고레츠키·그레셀·뮬러 부사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6명의 부사장이 컨트롤타워에 있으면서 위기와 기회가 공존했다. 1985년경 고레츠키 부사장 부임 당시 바이엘은 한 달 간 셧다운됐다. 영업사원 8명이 밀어넣기와 할인·할증으로 물의를 일으켰는데, 회사가 이들을 중부경찰서에 고발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생산직 여직원들은 이에 분개해 회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결론적으로 사측은 영업사원에게 청구한 수억원대 금액을 손실(대손)처리로 계상해 사건을 마무리했다. 1988년 뮬러 부사장 재임시절은 바이엘이 국내에 안착할 수 있게 한 최고의 전성기로 평가 받고 있다.

바이엘을 포함한 국내 진출 다국적 제약사가 우리나라 제약산업에 기여한 점은 가내수공업 수준의 제약환경과 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이다. 기초와 초석을 함께 닦은 파트너였고, 선의의 경쟁자이자 기록을 높여주는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오리지널 의약품이 국내에 런칭되면서 과학적 판촉·마케팅 기법도 함께 도입됐다. 고용창출과 기술전수도 빼놓을 수 없다. 함께 일하고 부딪히면서 알게 된 글로벌 네트워크도 큰 자산이다. 반면 선민의식과 노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 각본대로 움직이는 프레임 경영은 어두운 면으로 지적된다.

1970년대 초창기 바이엘약품 임직원은 200여명, 매출은 100억원 대에 머무는 수준이었다. 47년이 지난 지금의 바이엘코리아는 544명의 구성원이 연매출 3489억원을 창출하는 대형제약사 반열에 올랐다. 코스피·코스닥에 상장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괄목할 성장을 이뤄냈다.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국민과 함께 울고, 웃었던 바이엘이 이제 국내 공장철수(안성 조영제공장)를 결심하고, 이를 단행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우리가 인식했든 못했든 바이엘에서 생산된 의약품을 복용하고 생명을 구한 사례도 많을 것이다. 생명을 다루기에 제약업의 가치는 숭고하고 존엄하다. 그러나 국내 진출 이전부터 이미 짜놓은 '30년 후 공장철수 프로젝트'의 진실은 떠나는 바이엘에 뜨거운 눈물과 박수를 보내지 못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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