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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선] 대문호 펄벅과 유일한의 독립정신

  • 노병철
  • 2021-08-15 06:30:00

[데일리팜=노병철 기자]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한 고(故) 유일한 박사(1895~1971)의 창업 정신이자 평생의 유훈이다. 평양 출생인 그는 9남매 중 맏아들로 1904년 9살 때 외교부 참서관을 지낸 박장현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미시간·캘리포니아·스탠포드대학에서 경영·법학을 전공했다. 이후 잠시 미국에서 라초이식품회사를 운영하다가 결혼 후 한국으로 넘어와 유한양행을 창업했다. 1939년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실시, 사세를 확장해 만주·다롄·톈진 등 동북아 일원에 걸치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세계 시장 확보 전초기지를 마련했다.

일반적인 유일한 박사의 업적은 앞서 살펴본 대로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의 초석을 이루고 사회적 기업을 실현한 기업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생애를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 밑바탕에는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고 주권 회복을 위한 직간접적인 활약상이 더욱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민족·국가적 시련이 가장 컸던 1900년대를 살아 간 그는 일제강점기·중일전쟁·진주만공습(2차세계대전)·한국전쟁을 미국·중국·한국을 오가며 직접 겪었다. 그가 세웠던 미·중 유한양행 출장소는 수출 전초기지 역할과 비밀독립운동의 장소로도 운영돼 왔다.

2차 대전 발발 당시 미국 펜타곤은 육군전략처(Office of Strategic Services·OSS·현 CIA 전신)를 신설, 일본군과의 전투에 투입할 특수부대를 꾸리고 있었다. OSS는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오는 정보를 분석하기 위해 이 지역에 정통한 인재를 찾고 있었고, 한국 담당 고문은 유일한 박사가 중국 담당 고문은 퓰리처·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펄벅 여사가 맡게 되며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펄벅과 유일한 박사의 전우이자 동지의 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펄벅은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고,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유일한 박사를 모델로 한 '살아있는 갈대'라는 작품을 1963년에 발표하기도 했다.

유일한 박사는 OSS 고문으로 있었으므로 세계 각국의 정보가 한눈에 들어왔다. 특히 중국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한 정보에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다. 임시정부는 김준엽, 장준하 등을 중심으로 광복군 제2지대로 하여금 OSS 훈련을 받도록 해 1945년 8월말경 국내 정진계획, 즉 독수리 작전을 감행해 한국인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또 유일한 박사는 김호를 비롯한 재미 독립운동가들과 힘을 합해 로스앤젤레스에 '한인 국방경위대'를 편성해 무장 및 군자금을 지원했다. 이 일을 하는 데는 청년시절 네브라스카 헤스팅스 한인 소년병학교에서 받은 훈련이 크게 도움이 됐다.

한인 국방경위대는 미국 정규군에 속할 수 없어 자주 민병 한인부대라는 이름으로 캘리포니아 민병대에 소속되었다. 유일한 박사는 그 부대의 이름을 맹호군으로 명명하고, 임시정부의 인준을 청원했다. 1942년 2월 29일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의 인준을 획득하고, 4월 26일에는 캘리포니아주 정부 인가장 수여식을 거행했다. 맹호군에게 대대기가 전달되고 맹호군 사령관 김용성의 지휘로 관병식을 진행했다. 비단천으로 만들어진 대대기는 남색 바탕에 한국 강산을 상징하는 맹호의 머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유일한 박사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독립지사의 헌신적인 노력과 독일·일본의 세계 대전 패망으로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된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에도 펄벅과 유일한 박사는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인권·사회봉사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펄벅은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에서 태어났지만 단편적인 대학 생활을 빼고 40년을 중국에서 살았다. 그녀는 중국 농촌과 농민을 그린 소설 '대지'를 1931년 발표, 퓰리처상을 받았다. 1933년 '대지'의 후속편 격인 '아들들', '분열된 일가'를 내놓았다. 주인공 왕룽 일가 3대의 삶을 그린 3부작으로 펄벅은 193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유일한 박사 그리고 그의 아내 중국계 미국인 호미리 여사의 영향으로 펄벅은 한국에도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다. 1963년 펄벅은 '살아있는 갈대'라는 소설을 영어판과 한국어 번역판(초판 제목은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을 동시에 발간해 국내외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살아있는 갈대'는 조미수교(1882년)부터 해방 직후까지 한 가문의 4대에 걸친 이야기를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펼친 작품이다. 작중 인물인 김일한의 실제 모델은 유일한 박사다. 펄벅은 1960년대 초반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해 소설의 무대와 사건들을 취재했는데 이는 훗날 그녀의 사회공헌 활동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펄벅은 1963년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펄벅재단을 설립했다. 아시아 각국의 혼혈아를 지원할 목적으로 세워진 펄벅재단은 이듬해 한국지부를 가장 먼저 창설했다. 그녀는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표현할 정도로 우리나라를 사랑했다. 펄벅은 한국의 전쟁고아 특히 혼혈 아동을 돕고자 했다. 유일한 박사는 그녀의 숭고한 뜻을 높이 받들어 유한양행 소사공장 자리를 펄벅재단에 흔쾌히 넘겼다. 1967년 설립된 펄벅재단 보육원 소사희망원은 원생들의 남·녀 기숙사, 교육장, 실습장 등을 만들었다. 펄벅은 원생들이 미용, 양재, 목공 등 기술을 익혀야 당당히 사회에 나가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녀는 1960년대부터 8차례나 소사희망원을 찾아 손수 아동들을 돌보고 가르치기도 했다.

이처럼 유한양행의 설립이념은 '나눔과 생명사랑'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사회공헌 활동은 펄벅재단에 소사공장 부지를 기꺼이 기부하면서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일한 박사는 1971년 타계 시, 전 재산을 공익재단(유한재단·유한학원)에 기부함으로써 만들어진 항구적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시스템은 유한양행 사회공헌의 뿌리가 되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였으며, 모든 생애에 걸쳐 사회적 책임을 다한 기업가이자 사회를 위해 헌신한 사회사업가이면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가였다. 창업자의 이러한 정신적 유산은 유한양행 사회공헌 사업의 방향성이 되어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광복 76주년을 맞는 오늘 8월 15일, 시대의 거인 유일한 박사가 그리워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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