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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반값 감기약, 알고보니 사용기한도 절반?

  • 강혜경 기자
  • 2026-05-12 06:00:38

[데일리팜=강혜경 기자] 약사사회의 거센 우려에도 불구하고 창고형 약국의 개설 속도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다.

환자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손길이나 복약 히스토리보다는 '얼마나 싸게 떼어와 얼마의 마진을 남기느냐'가 지상 과제가 된 창고형 약국은 더 이상 입지도 중요치 않다. 너른 주차장만 있다면 마트 안이든 변두리든 '가격'이라는 강력한 무기에 이끌린 소비자들을 찾게 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최근 기자가 방문한 한 창고형 약국에서도 그 위력을 실감했다. 입구에 산더미처럼 쌓인 짜먹는 감기약의 가격표는 단돈 1500원.

평소 동네 약국에서 사던 가격의 딱 절반이었다. '득템'이라는 생각에 콧물약, 기침약, 종합감기약 등을 카트에 골고루 담았다.

비밀은 집에 돌아와 약 상자를 정리하면서 밝혀졌다. 약 아랫면에 적힌 사용기한은 올해 12월.

유통기한이 7개월 남짓 남은 약들이었다. 하지만 매장 어디에도 사용기한 임박에 대한 안내는 없었다.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아플 일이 있을까?', '주변에 나눔이라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합리적 소비였다는 자부심은 순식간에 처치 곤란한 계륵을 떠안은 듯한 자괴감으로 변했다.

또 다른 창고형 약국에서도 유통기한이 올해 12월까지인 동일한 감기약을 동일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물론 이 약국의 경우 제품별 사용기한을 명시해 소비자들이 유기가 짧은 약임을 알게 했다.

'유기 임박약'에 대한 판매 기준이 명확치 않다 보니, 일반 약국에서는 반품하는 약들이 창고형 약국에서는 반값에 판매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혹해서 샀다가 집에 오니 계륵이 되는 현상은 기자의 개인적 경험에 그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약사의미래를준비하는모임이 창고형 약국 이용자 1000명을 대상으로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5.3%가 기자처럼 계획에 없던 추가 구매를 했다.

'상비용'이라는 심리적 위안과 '진열 자극'이 결합된 결과다. 문제는 이 반값의 유혹이 실제 가계 경제에 도움을 주느냐다. 조사 결과 동네약국에서 3만원 이상 지출하는 비율은 3.8%에 불과했지만 창고형 약국에서는 그 비율이 무려 41.5%까지 치솟았다.

낱알 단가는 낮아졌을 지언정 대용량과 묶음 판매 전략에 휘말려 전체 지출액은 오히려 늘어난 역설적 상황이다. 결국 62.2%의 이용자가 가정 내 보관량 증가를 경험했고, 40%에 육박하는 이들이 사용하지 않고 남은 약을 '상비'라는 이름으로 쌓아두고 있었다.

더욱 우려되는 부분은 의약품이 소비재화로 변질될 수 있다는 부분이다. 우유 한 팩을 살 때도 제조일자를 따지며 신선도를 살피고, 첨가물표를 보는 것과 달리 창고형 약국에서 약은 마치 과자나 생필품처럼 카트에 담긴다. 

마치 참치캔이나 스팸 같은 가공햄을 살 때와 유사한 양상이다. 이 제품들을 살 때 일일이 유통기한을 살피지 않는 것처럼 약국에서 약을 구입할 때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기준 약국에서 구입하는 일반약 대부분의 유통기한은 28년으로 길다는 것이 암묵적으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세심한 복약지도와 병용 약물 확인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실제로 외부에서 약을 산 소비자의 64.4%가 정작 복용 방법은 동네 약국에 가서 묻는다는 통계는 외연 확장에 급급한 대형 약국들이 보건의료적 책임은 지역 약국에 떠넘기는 안전의 외주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AI가 처방 데이터를 분석하고 적합한 약과 건기식까지 추천해 주는 시대라지만 환자의 안색을 살피고 사용기한과 복용량을 세심히 조율하는 약사의 교감과 책임은 결코 대체될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꾸준히 챙겨먹어 소진할 수 있는 영양제도 아닌, 감기약을 사두고 아프기를 기다리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

진정한 합리적 소비는 1500원이라는 가격표가 아니라 가치있는 소비를 하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유통기한이 절반인 약을 반값에 샀다고 좋아하기에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보건의료적 기회비용과 안전의 공백이 너무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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