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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故 이종근회장은 말하지 않았을까?

  • 조광연
  • 2013-02-08 06:34:53

김일의 레슬링이 있던 날, 홍수환이 멕시코의 자모라와 일전을 벌이던 날, 토요일 타잔이 치타와 밀림을 뛰어 다니던 날 친구들은 우리 집으로 모여 들었고 나는 작은 권력자가 됐다. 아버지가 다섯 식구 반년치 생활비도 넘는 거금을 들여 '테레비'를 들여 놓은 탓이었다. 연극에서 새로운 막을 열듯, 테레비 화면을 가리고 있던 문을 주르륵 양쪽으로 제치면 타잔은 보란듯 줄을 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다니며, '우우우' 소리를 내어 숲속의 동물들을 불러냈다. 폼나던 왕년 1970년대 이야기다.

'왕년엔….' 과거는 증폭된다. 화려함도, 고난도, 낚시터에서 놓친 물고기 보다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마치 3년 내내 총 한번 제대로 잡지 않았던 취사병이 특공대원으로 부활하고, 사격을 못하던 고문관이 얼차려 받던 기억을 말끔하게 지운채 람보로 되살아 나듯 말이다. 우리가 왕년 이야기에 흥이 돋는 건 추억을 되새기다 스스로 취해버린 측면도 있지만, '만만하지 않았음'을 되살려 현재를 포장하고 싶은 심리기제도 있겠다.

흑백 TV시절, 대한민국 산업계의 기린아는 단연 제약회사들이었다. 침을 꼴깍 꼴깍 삼키며 타잔을 기다릴 때 서너 편의 의약품 광고를 보는 건 필수 코스였다. 레미제라블을 기다리며 보는 영화관 예고편처럼 말이다. 제약산업이 방송국 죄다 먹여 살리던 시절이었다. 삼성과 금성이 만든 TV 화면에 촌티 풀풀나는 광고들이 흑백 TV를 도배했던 당시 약광고는 단연 광고 문화를 선도했다. 그 메시지는 살아 움직이며 시청자들에게 생각의 물길을 열어 주었다.

제약산업 자부심과 책임감 한편의 시에 절절히 담아

여러 제약회사 광고가 있었지만 나이 지긋한 약업계 사람은 단 하나의 명품을 기억하고 있다. "꺼지는 등불도 끄지 않게 하시고/상한 갈대도 꺾지 말게 하소서/뛰노는 맥박에서 영원한 생명의 신비를 알게 하시고/(중략)/아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사람의 생명/하느님의 아들 딸의 생명을 지키는/너무나도 이 엄청나고 벅찬 사명의/두렵고 무겁고 자랑스러움을/깨닫게 하소서."

이 처럼 제약산업에 대한 자부심을 심장 깊이 숨겨 놓은 채 제약회사의 책임감을 드러내 약속한 이는 바로 종근당 창업자인 고 이종근 회장이다. 1973년 종근당의 기업광고는 이종근 회장이 박두진 시인에게 특별히 부탁해 만든 기업광고 메시지였다. 한국조폐공사가 2010년 발행한 100인의 한국 인물시리즈 52번째 메달의 주인공인 이종근 회장은 한마디로 '약업보국의 선구자'였다. "신념, 생각, 노력이 제각기 별도의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던 그는 도전정신 가득찼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1972년 국내 제약사 중 최초로 중앙연구소를 설립한 이 회장은 의약품 원료를 모두 수입해 쓰던 시절, 국내 최대 규모의 합성공장과 발효공장을 설립해 원료 국산화에 성공함으로써 이정표를 제시했다. 지금도 쉽지 않은 미국 FDA 실사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로 항생제 클로람페니콜을 일본과 미국 등에 수출 물꼬를 텄다. 1968년 일이다. 그 때 "그건 불가능하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지만, 그는 해냈다. 용맹했던 종근당을 비롯한 국내 제약산업이 추춤해진 건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 제도권에 갇히며 정부의 관리가 강화되면서 부터다. 정부가 산업적 측면대신 복지제도를 중시하는 사이 잠자던 중국과 인도가 깨어나 대한민국 제약산업을 추월하고 있다. 2013년 우리나라 제약산업은 첩첩산중, 어렵다. 살길로 제시되는 연구개발과 글로벌 진출에 대해서도 열의 여덟 아홉은 어렵다고 말한다. 만약 이 회장이라면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말했을까? 지난 7일 20주기 추도식을 지켜보며 불현듯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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