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훈 약사, 수필집 '서로 적막하여' 출간
- 노병철
- 2014-05-15 13:52:27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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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의 깊은 성찰 통한 '힐링' 메시지 담아…"사랑만이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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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아직도 모르면 큰일 나는 약국 신제품 정리 ‘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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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업계 자타공인 '힐링멘토' 이순훈 작가의 이번 수필집은 사랑을 메타포로 공존의 철학을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하나가 아닌 둘' '상실의 시대 진정한 벗' '상대를 배려한 아름다운 말 한마디'에 대한 화두를 운문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약사라는 전문성을 이입해 사람과 사람, 자연과 사람, 사람의 몸과 병, 의뢰인과 제공자 사이의 균형 잡힌 소통의 제시는 이 책의 숨은 백미다.
몸의 장기들과 소리의 연관관계까지 가로지르는 이순훈 작가 특유의 따뜻하고 명랑한 글쓰기 기법은 독자로 하여금 읽는 맛을 유발시킨다.
수필집은 景(경)-'서로 적막하며' '사슴을 닮은 섬-소록도' 외 9편, 思(사)-'약사의 소명' '길을 묻다' 외 9편, 論(논)-'허명을 넘어서' 외 11편, 音(음)-'마음의 연대' 외 10편, 感(감)-'니케의 팡파르' 외 10편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약사의 소명(85쪽)'편이 흥미롭다.
이편은 금천구약사회 봉사프로그램 '정약용119'에 대한 체험과 단상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약사들에게 '진정한 약사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곱씹게 하는 대목이다.
여름의 길목에서, 수필집 '서로 적막하여'와 함께 상생의 의미를 되새겨 봄은 어떨까.

작가의 말 - 경계에서
출석을 부르시던 선생님은 끝내 내 이름을 호명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대답 없는 어느 아이 이름을 몇 번이고 거듭 부르셨다.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아, 그제야 생각났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나 아이들이 너를 순훈이라고 부를 거야’ 하던 엄마 말이…. 꼴깍, 침을 삼키며 “선생님!” 하고 불러보았지만 그 소리는 입 안에서만 웅웅거릴 뿐이었다.
얼굴이 하얘진 내 앞으로 다가오신 선생님이 “네 이름이 순훈이잖아, 그지?” 하며 어깨에 손을 짚으셨다. 선생님 손닿은 곳이 얼음을 올려놓은 것처럼 차갑고 아팠다. 그 놀라움 때문이었는지 “그런데 진짜 이름은 그게 아니에요.” 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처음이라 부끄럼 타는구나. 내일은 네, 하고 대답해!” 하시며 멀어지는 선생님 발소리가 내 등을 자꾸 밀었다. 버티다 못한 나는 책상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양 몇 마리 세었어?” 형의 말버릇이었다. 약속시간보다 두어 시간 늦게 겅중겅중 뛰어 나타날 때마다 형은 늘 그렇게 물었다.
그건 하나의 물리적인 숫자에 불과했다. 같은 열 마리라도, 빠르게 붙여 세기도 느릿느릿 띄어 세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홉 마리 이후부터 아홉 더하기 반 마리, 다시 아홉 더하기 반에 반 마리… 가소성 강한 고무줄처럼 당기고 싶은 마음만큼 늘여 세기도 했다.
형이 입대하던 날, 지하철역 계단을 달음박질치다가 선물꾸러미 두고 온 걸 생각해냈다. 헉헉거리며 왕복달리기를 했다. 제 속도만 고집하는 지하철 안에서 아주 천천히 양을 세기 시작했다.
약속된 역 광장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센 양의 숫자는 아홉을 넘어 질척질척 열을 향해가고 있었다. “야, 그깟 종이학이 뭐라고…, 형답지 않게 눈물이 글썽해지는 것 같더라. 인제 어쩔래?” 형을 배웅한 친구의 퉁박이 내가 세던 양의 숫자를 한꺼번에 열 마리로 채워버렸다. 꽉 찬 열이라는 숫자가 그토록 목 메이는 아픔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근로의 대가로 월급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한 달 단위로 지급되기 때문에 나는 한 달, 그리고 일 년짜리 두 개의 생활계획표를 세우고 살았다. 모든 게 내 중심이던, 어떤 상황과 맞닥뜨려도 내가 능동체가 되던 시절이었다. 두려움 모르고 키를 넘는 돌발계획을 밀어붙이다 엎어지게 되면, 아파요! 누가 나 이해할 수 있게 설명 쫌 해줘 봐요, 떼를 써가면서.
약국 간판의 불을 환히 밝히고 소설가라는 옷을 입게 되면서 비로소 나는 ‘일과 관계’를 앞세우는 하루짜리, 한 달짜리, 일 년짜리 생활계획표를 세우게 되었다.
누구나 다 스스로에게 능동체가 된다는, 누구나 다 주변으로부터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며, 때론 키를 넘는 계획을 밀어붙이다 엎어지고 아파하며 억울해하기도 한다는, 아니, 진정한 능동체로 휘돌고 싶으나 몸의, 마음의 지지를 받지 못해 아파요! 누가 나 안 아프게 쫌 일으켜 세워줘 봐요, 떼를 쓰고 싶어 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면서.
까끌까끌한 종이 위에 ‘장래희망은 선생님’이라고 꾹꾹 적어 넣곤 하던 내가 어찌어찌하다 약사가 되고 이래저래하다 소설가가 되다보니 늘 두 이름(약사, 소설가) 앞에 빚을 진 마음으로 살고 있다.
모름지기 약사라는 또 소설가라는 직업은 생명의 정기를 사회적으로 발산시켜 순환하도록 이어주는 좌표 위에 서야 함을 이해한다. 의약품을 매개로 진행되는 모든 생체과학의 저변으로 몸을 향한 사랑과 배려가 관류해야하는 것처럼, 스토리텔링 역시 우회하며 헤매는 한이 있어도 종국에는 치유를 지향하는 인류애로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사이자 소설가인 나는 시나브로 그 지知와 행行의 간극에 갇혀 목이 마르다.
허나 도처에서 출몰하는 크고 작은 허들들로 하여 자주 휘청거리곤 하던 나는 바로 그 휘청임을 자양분 삼아 세상의 다름을 하나 둘 익혀왔음을 기억한다.
진짜 내 이름은 그게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을 때도, 아직 내겐 더 세어야 할 양이 남았었다고 훌쩍이며 돌아서야 할 때도, 그것 역시 ‘그저 겪음’을 넘어 단단한 하나의 옹이로 내 속을 파고들어 다음 걸음을 위한 도움닫기 구름판이 되어주었음을! 하여 오늘도 나는, 멈칫거려지는 망설임을 누르며 선뜻 사람들 속으로 어깨를 밀어 넣는다. 가진 지혜가, 베풀 여력이 여전히 미진함으로 발생하는 목마름은 성실로 메워가며. 2014년 봄, 나는 겁도 없이 세상이 정해놓은 규격을 살짝 비껴선 또 하나의 서툰 수필집 『서로 적막하여』를 내놓는다.
뿌리칠 수 없는 두려움이 저만치서 키를 자랑하지만, 전 지구의 한지붕화를 이뤄낸 이 천하무적 디지털시대를 꾸역꾸역 살아내면서 ‘나 잘 살고 있는 건가?’ 습관처럼 중얼거리곤 하는 나와 내 이웃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방패삼아 능동적으로 서로 적막해져가는 우리들 관계의 틈 속으로 낑겨드는 맑은 물살 한 줄기 흘려 보고픈 갸륵함을 함께 담는다.
어쩐지 무모해 보인다구? 숨겨지지 않는 내 영감 부족·필력 부족을 그렇게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봐줄 어떤 그대와의 만남도, 오직 스스로의 보위만을 집착하기에도 버겁기만 한 이 예측불허의 시대적 흐름을 뛰어넘는 소중한 인연의 마주침이 아니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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