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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로부터 약국을 지키기 위해 싸운 영국의 약사들

  • 데일리팜
  • 2014-11-03 06:14:47
  • [연재17] 복합상점의 등장과 약사(藥事)에 대한 위협

영국에서 1880년 법원 판결에 의해 기업체 소유의 복합상점이 문을 열 수 있게 되었고 제시 부츠가 처음으로 복합상점을 열었다. 런던이나 지방 모두에서 다른 기업들도 재빨리 이를 뒤따랐다. 그들은 그들의 구매력을 이용해 이익이 나는 의약품을 구매하여 할인가로 판매하면서 그들의 사업을 지키려했고, 이는 독립 자영약국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런 현실 속에 처한 자신들을 발견한 사람 중에는 윌리암 글렌-존스(후에 윌리암경)가 있었다. 그는 광산측량사로 짧은 기간 일을 하다가 에버데어에서 약국 도제생활을 마치고 런던으로 왔다. 그는 처음에는 풀햄과 버몬지에서 의사의 조제보조로 일하기 시작하여 1891년에 약학 야간과정을 마치고 약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그는 경력을 쌓으려는 생각에 의대에 등록을 했으나 1893년 이스트인디아덕로드에서 약국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이 지역에서는 의사들이 자신들의 조제는 자신들이 거의 다 하고 있었고 소매약국의 주요 영업부문인 의약품의 판매는 대형 복합점포들이 할인가로 판매하여 일반 약국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런 문제에 직면한 글렌-존스는 이 문제를 풀어갈 선도적인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전매품거래협회

글렌-존스는 최고의 약국을 위해 해결할 문제점들을 열거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단호한 행동에 나섰다. 그는 1895년 월간지인 '더 안티커팅 레코드'를 발행했다. '더 파마슈티컬 저널'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그들의 품목 거래에서 적정한 이익을 보장하는 소유자들과 전매약 도매업자, 소매 약사들의 이익을 위해 발간한다'는 선언을 하면서 영국에서 영업 중인 케미스트들에게 이 저널을 다 보냈다고 한다. 이 저널은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제조업자들이 그들의 제품에 대해 현재의 이윤을 우리에게 보장해주는 현 단계에라도 우리가 만족하려면 우리는 그들의 제품에 대한 대체품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반대의 뜻을 전하거나 반대로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도 있다는 우리의 강력한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다른 측면으로 제조업자들이 자신들이 더 이상 보호해 줄 수도 없고 대량거래를 하든가 아니면 비싸게 공급하겠다며 우리를 보호하길 거절한다면, 이를 대신하여 소매약국에 이윤을 줄 수 있는 적당한 대체품을 공급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갖기 위해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야 한다."

약사들은 이 발간 계획을 이루기 위해 매년 반 크라운의 구독료를 내달라는 요구에 기꺼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창간 저널의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더 파마슈티컬 저널'도 "이 계획의 기안자가 너무 광범위하게 팽배해 있는 타성 속에 이를 어느 정도 넘어설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고 보도했다.

'더 케미스트 앤 드러기스트'도 비슷하게 보도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생각보다 매우 빨리 진행되었다. 1896년 2월 전매품거래협회(PATA)는 첫 이사회를 열었고 1년 만에 판매가에 있어 매우 획기적인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PATA가 이렇게 빨리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글렌-존스의 노력의 결과였다. 1896년의 전반 6개월 동안에 그는 런던뿐만 아니라 엑서터 노팅엄 에딘버러 리즈 할리팩스 쉐필드 카디프 등의 지역 약사회 모임에서 연설을 했다. '더 안티커팅 레코드'는 PATA의 공식적인 저널로 1908년에는 발행부수가 1만부를 넘었다. 의약품에 대한 표준소매가(RPM)제도가 시작되면서 이 시도는 최근까지 ‘약업이라는 천직’에 이득을 주었다. 이때 시작한 의약품에 대한 RPM은 2001년까지 이어졌다.

케미스트 보호협회

글렌-존스라는 이름은 약학정책에서 유명한 이름이 되었고 1899년 약사협회 이사진은 그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가 해결할 시급한 과제로는 의사들의 조제행위와 법적으로 약사들을 지원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PATA 이사회를 통해 재빨리 케미스트 보호펀드 설립을 추진하고 1899년 11월 케미스트 보호협회를 세웠다.

이 협회의 목적은 약사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해 법적인 보호와 조언을 해주고 새로운 법안을 감시하고 이런 목적을 위해 적합한 케미스트와 법에 대한 조언자를 임명하는 것이다. 관련법에 대해 발간한 보고서만 20개에 달했다. 1899년 12월 2일 '더 파마슈티컬 저널'은 이 협회가 '공정한 사업을 하자고' 제기했다고 보도하면서 아래처럼 기사를 이어갔다.

"글렌-존스는 그럴듯한 말을 하는 사람으로 최근에 그가 하는 모험적인 사업에 지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것은... 전매품거래협회 설립에 참여한 이후에 이제 두 번째일 뿐인데, 이미 글렌-존스는 명성을 얻었고, 로이드 조지는 그를 '웰시 테리어(웨일스가 원산지인 테리어 품종. 여우·오터족제비·오소리 등을 사냥하는 데 이용한 작은 개로 용감하고 활기찬 것이 특징이다)'라고까지 불렀다."

의약품거래소송펀드

글렌-존스가 그 다음으로 관심을 갖은 것은 전매의약품의 소매에 세금을 부과하는 의약품인지조례였다. 이 법에 따라 내국세 세입청은 여러 약사들을 기소했다. 1902년 글렌-존스는 오랫동안 사문화되었던 '알려지고 받아들여지고 인정된 처방약'은 면세로 판매할 수 있다는 케미스트에게 허여되었던 권리인 면제조항을 방어무기로 시범적으로 이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갔다. 그는 '파머 대 글렌-존스' 소송에서 이겼고 연속해서 1903년 대법원에서도 승소하여 그 거래에 대한 권리를 되찾았다.

그의 활동 결과 그는 결과가 좋지 않았던 판결에 대해 약사들을 위해 항소할 펀드의 설립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1902년 7월 '더 파마슈티컬 저널'에 보낸 기고문에서 그는 의약품거래소송펀드 설립을 제안했는데 순식간에 이 목적을 위한 1000파운드의 기금이 모였다. 1902년 8월에 이 기금을 운영할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에 미래를 세심하게 준비할 수 있는 힘을 저하시키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글렌-존스는 그리 강건한 설립자는 아니었는데 정력적인 그의 여러 활동들은 그의 건강을 많이 손상시켰다. 그는 그의 과업을 다 마치지 못한 채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출판사 바로가기 www.pharm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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