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바꿔준 세 사람 강·민·이"
- 조광연
- 2015-05-12 06: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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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석]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김원배 동아ST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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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배 동아ST 대표이사 부회장(67세)은 서울약대 출신으로 서울의대 출신의 강신호 회장과 함께 대한민국 제약산업을 선두에서 이끌어 온 인물이다. 신약개발 등 R&D 부문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하며 단단한 바이오 포트폴리오 구축의 주춧돌을 놓았고, 자이데나와 같은 케미칼신약, 스티렌과 같은 천연물신약을 성공시켰다.
아담한 키에 안경, 그리고 적은 말수, 여기에 조용한 미소까지 번지면 그는 영락없는 연구자 모습이다. 하지만 "서울약대 진학부터 동아제약 입사까지 큰 꿈이나 뚜렷한 계획이 있던 건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점수에 맞춰 대학을 선택했고, 졸업할때까지 뭘하고 살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군대있을 때 제약회사 다니던 친구가 찾아와 제약사 괜찮은 거 같다고 해서 제대 후 입사하게 됐어요. 입사해서도 가만히 생각하니 성격상 연구하면 자유의지도 관철시킬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제겐 큰 영향을 미친 세분의 스승님이 계십니다."
김 부회장은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받기 이전 이미 장영실 상만 다섯 번 받았고, 특허청에서 과학기술상 지석영 상을 수상했다. 산업기술진흥협회로부터는 기술경영인 상을 받기도 했다. 보건의 날에는 의약품 연구개발을 통한 인류 건강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훈했다.
신출내기 연구자가 어떻게 동기를 부여받고 족적을 남기는 연구자로 성장하게되며, 경영인으로까지 발탁돼 장수하는지 궁금했다. 그를 5월 6일 오후 용신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박카스 디를 마시며 이야기는 시작됐다.

"기업 연구자가 받기 어려운 상이라 제겐 더 각별합니다. 창조장 받고 인생을 돌아보게 됐는데, 인덕을 참 많이 봤더군요. 꼽아보니 세 분의 스승이 계시더라고요.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잘 태어난 것도 아니었는데 이 분들의 영향으로, 부족한 제가 성장했구나 새삼 느꼈습니다."
▶세 분의 스승, 누구세요?
"강신호 회장님, 민신홍 박사님, 이상희 전 과기부장관님이세요. 모두 회사와 관련된 분들이죠. 강신호 회장님은 창의력이라는 점에서 제게 많은 영감을 주셨어요. 회장님은 누구라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게 대해 늘 왜? 라는 물음표를 찍으시죠. 정말 그럴까? 왜 그럴까? 저대로 있는 게 정말 옵티멀(optimal)한 건가라고 물으셨죠. 연구자인 제게 발상의 단초를 제시해 주신거나 다름없는데 이렇게 문제의식을 갖다보니 재미있게, 자연스레 몸에 배이게 됐어요."
▶민신홍 박사님으로부터 뭘 배우신 거죠?
"제가 연구원일 때 연구소장님이셨는데 품격있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대인관계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배려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셨죠. 겸손해져야겠다고 다짐한 것도 소장님 덕분입니다. 민 소장님은 연구자로서 꾸준히 탐구하시면서도 연구자인 제게 자유, 다시 말씀드려 많은 기회를 허락해 주셨어요."
▶이상희 전 과기부장관님도 동아제약 출신이신데요.
"연구소 상사셨을 때 일로 저를 단단하게 훈련시켜 주신 분이죠. 새 프로젝트를 많이 맡겨 주셨는데 당시엔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죠. 몰입, 몰두라는 게 또 무슨 의미인지 몸으로 보여주셨는데요, 한마디로 이 분은 한번 일을 잡으시면 시간 개념이 없으세요. 밤샘은 예삿일이죠."
▶아는 분만 아는 이야기지만, 이상희 전 장관님과 함께 큰 일을 해내셨죠?
"이 전 장관님은 항상 '10년 후 일어날 일을 가지고 일하자'라고 말씀하셨죠. 일을 크게 보고, 기획하고, 조직화하는데 탁월하셨죠. 많이 배웠습니다. 5공화국 시절로 기억합니다. 민정당 정책연구소에서 이 전 장관님이 일하실 때인데 갑자기 부르시더니 '유전공학이 국가를 육성하는 시대다. 대통령께 브리핑 해 국가 주요 사업이 될 수 있게 자료를 만들어 보라'고 하시더군요. 고백컨대 유전공학이 뭔지 제대로 몰랐어요. 방법이 없잖아요. 밤샘 독학했죠. 지금 생각해도 공들여 일목요연하게 잘 만들었던 것 같아요."
▶좋은 결과 얻으셨나요?
"저돌적이신 이 전 장관님이 해내셨죠. 길목에서 대통령께 브리핑을 하셨어요. 해서 유전공학 기술 근처에라도 가본 5명으로 유전공학센터를 설립하고 이어 대학내 유전공학과 설치, 유전공학연구조합 창립 등 유전공학과 관련한 패키지가 모두 성사됐습니다. 돌아가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님이 연구조합 초대 이사장을 맡으셨었죠. 전 이 과정에 참여하고 지켜보며 일은 어떻게 하는지 원리를 터득했다고나 할까요."
▶ 세분의 스승도 훌륭하시지만 새 것을 받아들이는 감수성도 대단하신것 아닌가요.
"내 방식대로 살면 되지하고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늘 평온하고, 온자한 모습을 지닌 동기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사람들에겐 배울게 많구나 깨달았어요. 마음이 바뀌니 자연스레 남의 말을 경청하게 되더군요. 경청은 마법이나 다름없더군요. 예를들면 어느 가정에서 쓰는 비방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쳐봐요. 그러면 연구자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과학의 관점으로 그 사람의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하는데 온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을 써서 대체 얻는 게 뭐죠? 없어요. 그저 시간이 아까울 뿐이죠. 하지만 경청하면 달라집니다. 천연물 신약 개발엔 경청이 큰 몫했습니다. 잘 들어준다 소문나니 자꾸 찾아오더군요."
▶동아ST가 다른 제약사와 견줘 일찍 바이오의약품을 세팅하는데 부회장님 역할이 컸다고들 합니다.
"유전공학 브리핑 자료 만들며 독학하다보니 이거다 싶더라고요. 1983년께 회사에 유학을 보내달라고 했죠. 허락을 받아 여기저기 회장님 이름으로 편지를 쓰다가 제휴 관계로 가깝던 오츠카제약의 세포공학 연구팀, 요즘말로 유전자재조합 단백질 치료제 연구팀에서 1984부터 1년간 연수를 받게 됐죠. 오츠카제약에 갔는데 연못에 떠있는 바위 조형물을 보고 창의성이란 낱말을 되새기게 됐어요. 생각의 틀을 깨는 것, 이게 바로 신약 개발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을 굳혔죠. 제 인생 스승 한분을 외국에서 추가하라면 돌아가신 아키히코 회장님을 꼽고 싶습니다."
▶오츠카제약에 도착해 배고픔으로 배운게 뭔가요.
"유전공학과 관련해 6개월을 배우고 나머지 기간은 1주일씩 연구팀을 돌며 신약개발 과정을 눈으로 익혔어요. 책에서 본 그림으로 신약개발을 짐작하던 때 오츠카 연구원들이 실제로 유전자를 꺼내 자르고, 붙이고, 다른 미생물에 넣어 단백질을 대량생산하는 모습 정말 감동적이었고 신세계더군요. 한가지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어서 한국에 돌아가서 해봐야 겠다는 욕망이 꿈틀거렸어요. 신약개발 과정에서도 많을 걸 배웠는데, 어떤 물질을 어떤 기준으로 선별하고, 단계마다 고, 노고(Go/No Go) 판단을 하고, 실험이나 자료는 어떤 게 우선인지 눈치껏, 할 수 있는 만큼 호기심을 채우는 일이 기뻤어요. 나중에 동아는 어떻게 신약개발 실패율을 줄일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게된 토대가 된 것같아요. 결국 현장에서 배우는게 빠르더군요. 해서 나중에 신약개발조합에 제안해 국내 연구자들을 오츠카제약에 많이 연수보냈죠."
▶ 당시 일본과 기술 차이가 몇년 하는 식의 비교가 많았는데, 현장에서 보시니 어땠나요.
"1978년 당시 야마노우치 안전성연구소에 들렀는데 연구 인원만 300명이더군요. 지금도 우리 나라 제약사 중 300명 연구원을 가진데가 몇 곳 안되는데 말이죠. 30년 지나도 못 따라겠다는 좌절감이 들기도 했죠. 그렇다고 손 놓으면 영원히 못하는 거니까 우리 방식대로 해야겠다 다짐했어요. 다국적사가 100개의 프로젝트를 한다면 우리는 작은 돈으로 2~3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지금도 유효한 생각이라고 확신합니다."

"회사에 와서 바이오 제품을 만들기로 했죠. 임원진 앞에서 이건 꼭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는데 용어자체가 낯설 때니 애썼다며 고개만 끄떡이는 정도였어요. 어렵사리 뜻맞는 연구원 5명과 조그만 방안에서 생명공학연구팀을 만들었죠. 당시 엘지가 100여명 연구원이 있을 때라서 회사에선 그거 안 될거란 말이 많았어요. 그게 오히려 독기를 품게 만들었어요."
▶누구나 독기를 품지만 오래 지속하기 힘들텐데요.
"뭔가 보여주자 결의를 했죠. 진단시약이 제일 만만해 보였어요. 애보트가 전량 수입해 판매할 때죠. 어려운 과정 참 많이 겪었어요. 그래도 열정만은 대단했죠. 세상에 있는 걸 왜 우리가 못하느냐는 단순한 열정 말이예요. 집에 못간 날 허다했죠. 효소면역법에 기반한 진단시약 정말 힘들었어요."
▶궁금해 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죠?
"플레이트에 항원이든 항체든 코팅을 하려면 말려야 하는데 알고 있던 감압 건조법으로 하면 항원 항체가 죄다 빨려 나가는 거죠. 생산성이 형편이 없는 거예요. 좌절했어요. 이런 저런 수소문 끝에 선진국 어느 공장 견학을 가게 돼 공정을 쓱 보곤 무릎을 쳤어요. 사진을 찍었죠. 나오다 필름을 모두 뺏기고 망신을 당했지만 해법을 찾았다는 생각에 환호했어요. 그때 본게 뭐냐면 코팅할 플레이트를 콘베이어 벨트위에 놓고, 드라이기 열풍이 나오는 터널을 지나며 건조시키는 방법이었죠. 콜럼버스 계란 세우기인데 우리 생각을 가로 막은 건 단백질은 열에 약하다는 것이 전부였죠. 고정관념의 타파와 현장의 중요성 깨달았죠."
▶회사에서 믿지 않으시던 분들 코가 납작해 졌겠는데요.
"아닙니다. 제품이 나갔는데 일주일도 안돼 반품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진단시약은 한번 쓰고 나면 오염이 되는데 영양성분이 많이 들어가 상하는 거죠. 방부제 넣는걸 생각조차 못했던 겁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납품이 되고 하니까 회사에서 뭣 좀 하나보다 하시데요."
▶탄탄대로가 열렸네요.
"B형간염백신을 하자 이렇게 의기 투합하고 의기양양 했는데, 회사가 승인하지 않았어요. 너무 아쉬웠죠."
▶실망하셨나요.
"실망이야 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잖아요. 성장호르몬으로 눈길을 돌렸어요. 일단 기술이 확립되니 G-CSF, 인터페론 등 순식간에 성공하더라고요. 지금 수출 효자품목을 그때 다 한거나 마찬가집니다. 더 고난도인 EPO 개발에 도전했지만 당시 국내엔 산업화 할 수 있는 연구자가 없던 터여서 대학도 찾아가고, 러시아 연구소까지 갔죠. 마침 EPO 연구한 게 있어서 공을 많이 들였는데 다른 기업이 계약했죠. 아쉬웠습니다. 결국 EPO 만들어내 수출도 하고 있어요. 그런식으로 생물의약품을 단시간내 많이 만들었어요. 스스로는 5명의 열정이 대견해요. 지금도."
▶ 동아에스티 안에 생명공학 제품이 반듯하게 자리잡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셨지만, 상업적 성공을 거둔 신약과 개발하는데도 관여하셨죠?
"발기부전치료제 자이데나와 항생제 시벡스트로는 상당히 많이 관여 했어요. 자이데나는 연구소장할 때, 팀장이었던 유무희 박사가 주도했죠. 회사가 심장약 개발 연구력이 누적돼 있었던데다 당시 삶의질(QOL) 의약품이 강조되던 때였거든요. 유쾌하게 개발된 신약이예요."
▶시벡스트로는 글로벌 신약이자 블록버스터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독특한 개발기원이랄까 뭔가 사연이 있을 것다는 예감이 듭니다.
"이상희 전 전 장관께서 동경대 약대출신으로 자기 집에 연구소를 차려놓고 부인은 약국을 하던 분을 소개해 줬어요. 세파계 항생제 신약 개발에 심취했던 분이죠. 2년정도 했어요. 그 분이 물질 만들면 우리가 평가해 피드백 하고 했죠. 그런데 좋은 게 나오면 경쟁사 연구가 더 나은 걸 내고하며 답보 상태였어요. 해서 세파계를 버리고 다른 항생제를 연구했는데 그게 오늘날 시벡스트로죠."
▶한 프로젝트가 답보상태면 회사가 기다려 주지 않을 텐데요.
"시벡스트로 담당 연구팀장이 비판을 많이 받았어요. 시벡스트로가 효과는 좋은데 풀지 못한 숙제를 안고 있었거든요. 평가를 전체 연구소가 받으니까 시벡스트로 팀이 원망의 대상이 되는 거죠. 이 팀장이 상당히 주눅들어 프로젝트 포기하겠다고 당시 연구소장이던 제게 이야기를 꺼네더군요. 그래서 제가 말렸어요. '7년간 했으니 너보다 잘할 사람이 없다. 물질은 좋은데, 약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알지 않느냐. 좀더 해봐라'고 말해줬어요. 문제는 우연히 풀렸죠. 재미과학자가 회사에 와 세미나를 부탁했는데 색다른 개념의 프로드럭 이론을 제시하더군요. 이 방법으로 단번에 성공했습니다."
▶시벡스트로가 잘 나가니 과거 기술수출을 놓고 가정법도 나옵니다. 만약 동아가 했다면 같은 가정법이죠.
"국내서 임상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감염증 환자는 로컬 클리닉에 많은데 종합병원만 임상할 수 있는 환경이었죠. 실험실에서 드라마틱했고 동아가 국내 1위 기업이었지만 실패를 감당할만큼은 아니었거든요. 더구나 국내 투자환경도 신기술엔 인색했죠. 투자에 원금보장같은 옵션이 따라 붙는게 정석일 정도였으니까요. 라이센싱 아웃하는 방법 밖에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아쉽지만 시벡스트로 기술을 가져건 미국 회사처럼 우리나라 제약회사들이 하면 그 또한 훌륭한 비즈니스가 될 겁니다."
▶동아에스티는 케미칼, 바이오, 천연물 등 포트폴리오가 반듯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스티렌, 모티리톤 같은 천연물 신약 어떻게 나오게 된겁니까.
"연구소 사이트로만 말씀드리죠. 천연물 연구 왜 했냐하면, 중간에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였어요. 신약연구는 아시다시피 십여년이 보통이다보니 연구소 홀로 지속성을 유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발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천연물을 하기로 한거죠."

"서울대 천연물연구소 이은방 교수님 연구발표를 보고 찾아가 스티렌을 개발한 이후 다음 프로젝트는 모티리톤이었죠. 서울대 미생물실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중에 약대생이 있었는데 부군이 한의사였어요. 그 분이 쓰는 처방을 연구개발한 게 바로 모티리톤이예요. 결국엔 남의 이야기 많이 듣고 그런데서 아이디어를 얻게된 겁니다.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어디든 찾아가 함께 해보자고 권유하는 일을 많이 했어요. 제약회사 입장에서, 또 광범한 의미에서 이는 적극적인 연구행위 입니다."
▶천연물 신약에 대한 부회장님 관점은 뭔가요.
"서양 과학 입장에서 의약품은 질병의 원인 타깃을 찾고 이에 들어맞아 효과를 내는 물질입니다. 당연히 신약도 그런 식으로 설계되겠죠. 천연물은 좀 다릅니다. 타깃이 한 두개가 아닌 것같습니다. 몇개의 작용점이 있는데 평가와 허가 기준은 서양 의학계 기준에 따릅니다. 천연물이라는 건 동양지식을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개발 과정, 허가제도 같은 것도 우리가 기준을 만들어 정립해야 한다고 봅니다. 천연물은 우리가 선진이잖아요. 임상시험법,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건축만해도 그래요. 우리 고유의 건축기술과 융합없이 현대건축 기법이 도입되다보니 프랑스, 노르웨이처럼 자기들만의 건축양식이 형성되지 않았잖아요. 천연물신약이 바로 그래요."
▶천연물의 가능성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의학 진단 기술 발전과 경험지식이 합쳐지는 새 길이 모색돼야 합니다. 진단기술이 발전해 질병 예측 수단이 많아지면 질병이 비가역 단계로 들어서기 전, 즉 가역 단계에서 건강상태로 되돌리는데 천연물의 역할이 있다고 봐요.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 FDA가 천연물약 2개를 허가했어요. 이는 단순한 합니다. 효과가 없는데 허가해 줬을까요? 치료보다 예방과 관리에 돈을 쓰는 게 의료보험 재정절감에도 효율적이죠. 천연물은 이런 방향으로 발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봅니다."
▶ 약 30년은 연구원과 연구소장으로 지내셨고 또 10여년을 대표이사 사장과 부회장 등 경영진이시다. 연구를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차이가 있습니다. 연구원에게 연구란 기술적, 학술적 가치가 얼마나 있느냐를 많이 보게 되죠. 동기유발이 바로 여기서 됩니다. 그래서 제제연구 보다 신약 연구를 선호하게 됩니다. 한데 연구소장 입장으로 보면 연구의 성공 가능성에 눈이 더 갑니다. 비로소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나를 고려하게 되는 것이죠.그래서 연구를 이끄는 리더는 다양한 분야와 소속 연구원들의 심리를 고려해 격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 그럼 경영자의 눈은 어디에 가 있나요.
"경영자는 연구투자 이익과 다른 시설투자, 생산능력을 확장, 기존 제품에 대한 판촉과 프로모션을 저울에 올려 무게를 달게 됩니다. 시각이 바뀌니 연구소를 보며 생산성을 높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저 역시 연구가 미래를 먹여 살릴건데 하면서 회사 투자 결정을 원망도 하던 연구소장 출신인데도 말입니다. 입장은 그렇게 다르더라고요."
▶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지면 무엇을 하세요.
"사실 취미가 없어요. 그래서인지 요즘엔 인문학적 식견 높이려 강의도 듣고 합니다. 이제서야 삶의 본질, 정체성을 고민해 봅니다. 사람이 시기가 있나봐요. 제가 가진 걸 내려주고, 주변을 키워주고, 육성하고 싶어요. 간혹 너무 약학에만 빠져있었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 연구자, 경영자로서 성공적인 삶이셨는데 부회장님에게 앞으로 일은 어떤 것일까요.
"좋아서 몰두하는 일 하고 싶어요. 돌이켜보니 10년 단위로 인생을 설계하고 실천하며 살았더군요. 질문을 받고 보니 회사를 생명공학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겠다며 미친 듯 뛰어다녔던 과거 10년 단위 삶이 떠오르네요. 유전자치료제였는데 우리나라에선 임상이 어려워 이나라, 저나라 허가당국 문을 두드렸거든요. 이 때 열정을 다시 불러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식품 소재에다 발효 기술을 접목해 뭔가 만들고 주변에 나눠주고 하고 싶습니다. 물론 회사 일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재밌있게 말이죠."
▶ 신약개발과 가치를 전파하는 전문 칼럼니스트는 어떨까요. 제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아, 그건 아닌 것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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